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④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④ 파코미우스를 찾아서

개인수행에서 집단수행으로 옮겨간 초기 기독교

김용옥 | 제11호 | 20070526 입력
1 안토니 수도원 수도원 공동식사의 한 전형을 나타내주는 장소. 이곳은 안토니 수도원의 식사 장소로서
고대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우윳빛 강석회암 통돌을 깎아 만든 긴 식탁과 긴 의자가 너무도 깨끗했다.
앞쪽의 설교대와 같은 돌덩이는 식사시간 동안에 헤구멘이 성구를 봉독하는 곳이다.
그들은 성구를 들으며 밥을 먹는데, 밥 그 자체를 하나님의 아가페로 생각했다. 해설자는 루메우스 수사.
안토니가 동굴에서 단식하고 있는 동안 어느 인자한 노승이 빵을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날짐승이 덮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아리따운 여인이 요염하게 유혹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군인이 창을 들고 나타나 찌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채찍으로 그를 휘갈겼는데 거의 죽음의 직전까지 휘몰아가기도 했다. 사탄에 의하여 나타나는 이 모든 환영을 그는 열렬한 기도와 참회의 행동으로 물리쳤다. 안토니의 이러한 고행 과정은 후대 문학과 회화의 끊임없는 주제가 되었다. 특히 중세 후기의 매우 창조적인 성상화가였던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1450~1516), 당대 중세기 독일의 최고의 종교주제 화가였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newald, 1455~1528), 그리고 20세기 독일의 초현실주의 오토마티즘운동의 창시자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의 그림 속에서 그 내면적 고뇌, 그 상징성과 낭만주의적 신비성이 걸출하게 표현되고 있다.

샘물이 솟아나는 오아시스 자리와 그가 수행한 절벽 중턱 바위동굴 사이의 거리는 꽤 멀었다. 해발고도가 301m나 차이가 났다. 험난할 뿐 아니라 도무지 그 사막의 열기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 길을 한 시간 이상 헉헉거리며 올라가면서 안토니가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살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동반한 수도승에게 물었다.
“누가 그를 수발들었습니까? 최소한의 빵과 물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는 혼자서 다 했습니다. 샘과 동굴 사이도 혼자 다녔습니다. 먹을 것도 혼자 다 만들었고요.”
하 긴 그 사막에서 그를 보필하기 위해서만 생활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그렇게 고독하게 20년을 살았다(AD 286~305). 그 기나긴 항마성도의 고행을 박차고 하산했을 때 그는 성자로서 추앙받기에 충분했다. 그의 일거일동에는 성스러운 아우라가 감돌았다. 그 뒤로 이 지역은 그를 추앙하고 본받으면서 동굴수행을 감행하는 수도승으로 가득 찼다. 안토니는 건강한 모습으로 장수하다가 105세에 죽었는데(356년 1월 17일), 이 사막에는 자그마치 한 3000여 명의 그의 지도를 받는 토굴수행승들이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인도 데칸고원 아잔타(Ajanta)의 석굴을 방불케 하는 그러한 광경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남긴 편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주님 안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아는 자는 자신의 시간을 깨닫는다. 자신의 시간을 깨달으면 부질없는 인간의 언설에 동요됨이 없다.”

2 덴데라 덴데라 하토르 신전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는 기독교 성전 건물 폐허. 파코미우스 수도원 전통이 계승된 곳인데 이 유적 자체는 6세기 중엽의 것이다.
안 토니의 수행을 본받는 이 수도승들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평신도운동이었으며, 집단적이 아닌 개별적 수행운동이었다는 데 그 큰 특징이 있다. 이러한 극히 개인적인 수행운동을 에레미티즘(eremitism)이라고 부르는데 이 에레미티즘의 배경에는 로마 식민통치의 혈세(血稅)에 시달린 농민 엘리트들의 반체제적인 각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빈한(貧寒), 독신(獨身), 명상(冥想)을 실천하는 이들의 삶은 참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정신을 위협하는 부패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사막의 고독과 열기와 최소한 생존조건에 만족하면서, 자유롭게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나려는 수행의 열정에 헌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AD 4세기에 이르면 이미 기성의 교회들이 제식적 율법주의, 관습화되어 버린 형식적 예배, 그리고 겉치레의 봉사운동으로 이미 영성을 상실해갔다는 사실도 아울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 단위의 독자적 수행방식은 그 나름대로 문제가 많았다. 그 수행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체크할 수도 없고, 체크할 기준도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간섭 안 받는 개인의 행동은 정신병자를 양산할 수도 있고, 마귀에 씌어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를 성자로 추앙하는 해괴망측한 일도 비일비재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부작용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탁월한 영적 지도자가 수행의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라 수도승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효율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다. 등산도 홀로 갈 때 그 특유한 즐거움도 있지만, 험난한 등반은 반드시 집단조직과 행동을 요구한다.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규율이 있어야 하며, 캡틴의 리더십과 판단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대장-대원 간의 도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공자(孔子)도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라고 말했는데, 명상만 하고 배움의 규율을 등한시하면 엉뚱한 길로 가기 쉽다는 뜻이다.

3 안토니 성화 안토니수도원 교회 오른쪽 벽면. 안토니가 생활한 장소에 그려져 있는 성화. 사진=임진권 기자
개 인주의적 에레미티즘에 대비되는 집단주의적 수행방법인 세노비티즘(cenobitism)을 창시한 탁월한 수행자가 바로 파코미우스(Pachomius, c. 290~346)였다. 파코미우스는 안토니보다 한 세대 아래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보다 약간 연상이다. 파코미우스는 바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모든 공동체적 기독교 수도원의 첫 모델을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도마복음서를 전해준 주역이기 때문에 그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크다. 게벨 알 타리프의 항아리 속에 묻혀 있던 도마복음서는 바로 파코미우스의 수도원 도서관에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 코미우스는 내가 여행하고 있는 이 나그함마디 지역 체노보스키온의 콥틱어를 쓰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북아프리카 로마군대의 병정으로 징집당해 끌려나가, 나일강변에 있는 룩소르보다 약간 상류지역인 이스나(Isna)에 주둔하던 중 동료 장병 가운데 콥틱 크리스천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진지함과 신분ㆍ계급을 완전히 해탈해 버린 개방적인 이웃사랑 정신에 감명을 받고, 제대 후 체노보스키온에 귀향하자마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314).

그 후 그는 팔라몬(Palamon)이라는 은둔자를 만나 그의 영적 지도 아래 수도승으로서의 삶을 실천한다. 그런데 그 지역은 이미 안토니의 영향 아래 수없는 에레미티즘의 수도승들이 개인적으로 토굴 속에서 영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코미우스는 개인적 수도의 한계를 절감하고, 단체적인 규칙생활로써 보다 효율적인 수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념에 이르게 된다. 그는 덴데라(Dendera) 가까운 곳, 나일강 동편의 버려진 동네에 수도원을 짓고 담을 높게 둘러쌓았다. 그는 이곳을 타벤니스(Tabennis)라고 불렀는데(318), 이것이 인류 사상 최초로 본격적으로 시도된 기독교 수도원이다. 의외로 호응이 컸고, 고독하게 방황하던 많은 수도승들이 높은 담 안으로 모여들어 파코미우스의 지도를 받았다. 이러한 수도원의 산발적 사례가 그 이전에 이미 타처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파코미우스는 집단수도 생활에 관한 상세한 규율을 문서로 남겼고, 그 문서가 탁월한 성서 번역자 제롬(Jerome, c. 347~420)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서양의 수도원 제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제롬은 파코미우스가 콥틱어로 쓴 것의 희랍어 역본을 구하여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파코미우스는 이 규율들은 자기의 임의적 창작이 아니라 한 천사가 지속적으로 나타나 말해주었고 그 천사의 말을 옮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규율집은 성서와 동일한 권위를 갖게 되었고, 수도승들은 누구든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앵코라이트는 토굴승처럼 혼자 자유롭게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생활하는 반면, 세노바이트는 선방(禪房) 안거승(安居僧)처럼 완벽하게 규정된 공동규율 속에서 평생을 보낸다. 일어나는 시간, 낮에 사는 생활 스케줄, 자는 시간이 모두 결정되어 있으며, 공동기도, 공동식사, 공동경작, 공동복장, 공동 다이어트 규칙, 공동사용이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두에 엄격한 공동매너가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수도원에는 수도승들의 영적 지도자가 있어, 헤구멘(hegumen)이라고 불렸다. 헤구멘은 영적 스승일 뿐 아니라, 수도승들이 아무 생각 없이 수도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재정적 지원을 해야 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판주지(事判住持)와 이판조실(理判祖室)의 양면을 다 구비해야 한다. 파코미우스는 매우 유능한 헤구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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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③

중앙 SUNDAY

초기 기독교 수도승의 降魔成道, ‘타리프’ 절벽에 묻힌 비밀

③ 함라돔의 아이들

도올 | 제10호 | 20070520 입력
나 그함마디 문서 발견지를 탐방하고 내려왔을 때 나를 둘러싼 함라돔의 어린이들.
뒤로 보이는 절벽 밑 바위가 두 개 놓인 곳이 바로 문서 발견지.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는
꽤 먼 거리다. 이런 아이들이 도마복음을 발견한 것이다. 사진=임진권 기자
발 견지를 안다는 청년보다도 앞서 나는 낑낑대며 바위 절벽을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드넓게 펼쳐지는 나일강변의 평원은 정말 풍요로웠다. 그리고 사막의 바위산은 느낌이 강렬하다. 풀 한 포기 없는 붉은빛 나는 강석회암의 강인한 열기는 깎아지른 절벽의 압도적인 웅장함에 위용을 더해준다. 사실 내가 가고 있는 이곳을 두 발로 찾아온 사람은 아직도 생존해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의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 1924~ ) 교수(지금은 은퇴)를 제외하고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문서 발견지를 탐색하는 필자.
문 서는 이미 발견되었고 그 뒤로 이 문서의 연구가들이, 고고학 발굴 탐색단이 아닌 이상, 이곳을 방문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1975년 로빈슨 교수에 의하여 단 한 번의 탐색이 시도되었지만 사실 대대적 예산이 없는 상황에서 사막의 발굴이란 불가능하다. 더구나 ‘영지주의’로 잘못 분류되고 있는 이 콥틱 문서들은 세계 기독교인들의 환영을 받는 문서가 결코 아니다. 주변 바위동굴 하나에서 구약 시편의 몇 장이 쓰여져 있는 벽 낙서를 발견한 사실은 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 뒤로 나와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찾아온 신학자가 있을 까닭이 없다. 위대한 문서의 발견지로서의 역사유적 팻말 하나가 꽂혀 있질 않았다. 그 문서 항아리를 캐낸 곳을 바라보면서 감개가 무량했지만 나로서도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이 척박한 바위 절벽에서 도마복음이 나왔다니!

내가 절벽에서 내려왔을 때 나를 둘러싼 것은 총기를 든 괴한들이 아니라 함라돔의 나귀를 탄 귀여운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빙빙 돌면서 유쾌하게 웃고 장난을 쳤다. 나는 그들의 나귀에 올라타 보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고 재미있게 놀았다. 사막의 여우가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안내인이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안토니의 수행동굴로 가는길. 해발 781m. 우리나라 삼각산 백운대에 가까운 높이(위). 안토니 수행동굴로 들어가는 비좁은 크랙(중간). 안토니의 항마성도지. 완벽한 암흑이었다(아래).
“무궁화가 떴어요!”

나 그함마디 전 지역의 무궁화 4개짜리 총경이 떴다는 것이다(그들 계급장으로는 말똥 2개). 갑자기 “우앵~” 하는 경보소리가 들리고 백차가 나타났다. 나보고 얼른 사라지라고 마이크로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괘씸한지고! 이 위대한 문서 발견지에 관광온 게 뭔 잘못이라고 이리 부산한고! 우리는 십 리 이상을 그 백차 사이렌 소리에 쫓기면서 속력을 내야 했다. 나일강변 수로를 따라 우리는 도망치듯 질주했다. 경찰은 자기 관할지역에서 위험요소가 빨리 제거되기만을 원했던 것이다.

이 나그함마디 문서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파코미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에 관한 역사이야기는 나의 저술 『기독교성서의 이해』 속에 상술되어 있지만 본지만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간략히 서술할 필요를 느낀다.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초기기독교는 이집트지역에 엄청나게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압록강ㆍ두만강 이북의 만주땅이나 저 연해주의 광막한 발해땅이 결코 우리에게 소외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생활터전이듯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시나이반도나 이집트땅은 자기네 삶과 연속성을 이루는 공간이었다. 육로로 그곳을 여행해 보면 실제로 그러한 연속성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ㆍ연해주를 해방구처럼 활용했듯이, 로마의 압정으로 AD 1ㆍ2세기에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은 독립전쟁을 몇 차례 치른 후 이곳으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주했다. 과거 모세 시절부터 집단거주했던 이집트땅은 결코 그들의 역사의식 속에 이방의 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이미 철저히 헬라화되어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청년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323)은 BC 332년 이곳을 정복했다. 그의 사후 헬레니즘 제국이 3분될 때 이곳은 프톨레미 왕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시대에까지 4세기 동안 이 지역은 철저히 희랍문화의 지배 속에 있었다. 언어도 희랍어가 통용되었고 전통적인 이집트 고전상형문자와 공존했다. 줄리어스 시저, 마크 안토니와 세기적 로망스를 펼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Cleopatra Ⅶ, BC 69~30)도 알고 보면 이집트 토착민이 아니라 마케도니아 여자였다. BC 6세기부터 이미 이곳에 예레미야 선지자 등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하고 또 1ㆍ2세기경부터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면서부터 이곳은 절묘한 문화적 융합이 일어났다. 다원주의적 신화세계의 원조 격인 풍요로운 이집트의 다신론 문화와, 율법주의적인 유일신론의 헤브라이즘과, 사랑의 복음인 기독교 문화의 자연스러운 혼융(混融)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세 월이 흘러가면서 유대교는 쇠퇴하고 기독교공동체가 이 지역의 주류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신앙적 삶의 형태는 수도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초기불교가 비하라(vihara, 동굴승방) 중심으로 수도하는 비구들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듯이, 초기기독교도 이집트 아라비아사막의 동굴에서 수도하는 수도승들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초기 수도승은 매우 개인적이었는데, 이러한 개인적 수도생활을 영위하는 자를 앵코라이트(anchorite)라고 부른다. 이 앵코라이트를 대변하는 인물로서 우리는 이집트의 안토니(Antony, c. 251~356)라는 수도승을 꼽을 수 있다.

나는 요번 여행을 통해 홍해 옆 게벨 엘 갈라라(Gebel el-Galala) 지역에 있는 안토니의 수도동굴에 가보았다. 카이로에서 수에즈운하 쪽으로 135㎞를 달리고 다시 홍해를 끼고 아라비아사막을 160㎞ 남하하면 안토니 수도원에 도착하는데 참으로 험난한 사막길이었다. 그런데 그 뜨거운 사막에 수도승들이 자리를 잡는 곳에는 반드시 신비롭게도 샘물이 솟는다. 일년 내내 땡볕만 내려쬐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의 경이는 실제로 가보지 않으면 실감하기 어렵다. 그것도 쫄쫄쫄쫄 조금씩 흐르는 우리나라 약숫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펑펑 솟아나는 청정한 물길이다. 안토니는 그 물길 곁에 예수님을 모시는 사당과도 같은 조그만 움막을 지었고, 막상 수도는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돌산 절벽 꼭대기 자연동굴 속에서 했다. 나는 그 동굴까지 기어 올라가 봤는데 참으로 피땀이 맺히는 고행길이었다.

인도에서 싯달타가 우루벨라의 아리따운 처녀 수자타에게 유미죽을 얻어먹고 기운을 회복하고 난 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도생활을 했다는 전정각산(前正覺山, Prag Bodhigiri)의 유영굴(留影窟)의 험준한 모습과 매우 유사한 곳이었다. 그러나 유영굴보다 훨씬 더 가파르고 깊고 캄캄했다. 안토니는 이 비좁은 동굴에서 자그마치 20년을 홀로 수행했다. 안토니의 전기를 쓴 아타나시우스 주교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끊임없이 악의 세력을 대변하는 악마의 형상들과 투쟁하면서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영적 순결성의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다. 욕계의 주인 마왕 파피야스의 요염한 세 딸 등등, 다양한 마왕의 변신들과 투쟁하며 보리수 아래서 선정하는 싯달타의 모습이나 이집트의 초기기독교 수도승려들의 모습은 너무도 흡사하다. 모두 항마성도(降魔成道)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②

중앙 SUNDAY

‘엘카스르’ 농가의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도마복음

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 ② ‘함라돔’의 피비린내

도올 | 제9호 | 20070513 입력
‘사례금’ 덕분에 모시고 올 수 있었던 에즈발 부우사의 청년. 앞의 두건 두른 사람이 필자.
바로 왼쪽의 큰 바위 아래가 코우덱스 문서 발견지. 저 뒤로 보이는 동네가 함라돔. 사진=임진권 기자
한편 13개의 코우덱스(codex)를 어깨에 걸머지고 터덕터덕 귀가의 발길을 옮기고 있는 낙타 등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던 26세의 청년 무함마드 알리는 매우 침울하게 그리고 아주 골똘하게 묵상에 잠겨 있었다. 그가 이 파피루스 문서들의 소중한 가치를 그 억만분의 일이라도 알기나 했을까?

물어물어 함라돔으로 가는 길에서. 내가 이렇게 가정집에 사진기를 들이대도 수줍은 듯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지난 4월 21일 사막의 열기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낮, 나는 바로 그 길을 몸소 걸어가면서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무함마드 알리의 소식을 물어보기도 하고, 정확한 문서발견 장소를 알아내기 위하여 이 동네 저 동네를 탐문했다. 안내인은 나보고 매우 위험한 짓이라고 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에 관하여 사진 찍는 것을 금지시켰다. 내 카메라의 대상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일진대, 사람 빠진 유적만 찍으라니! 그러나 막상 시골사람들에게 사진기를 들이대면 물론 질겁하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사진 찍힌다는 사실에 대한 호기심으로 즐거워했다. 더구나 디지털카메라는 금방 찍힌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다. 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순박한 것이다. 이집트의 시골은 한없이 풍요로웠다. 구석구석이 생명력이 넘치는 옛 우리 농촌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쓸데없는 금기에 억눌려 있을 뿐이다. 나는 나를 수반했던 사복경찰에게 개인적으로 충분한 사례를 따로 하겠으니 나의 행보를 좀 자유롭게 해달라고 애걸해야만 했다. 이집트는 아직도 ‘개인적인 사례’의 약발이 멕히는 사회였다.

문서가 발견된 사바크(sabakh, 암석 비료) 채집장소는 함라돔(Hamra Dom)이라는 동네에서 가깝다. 그런데 무함마드 알리는 엘카스르(El Qasr) 즉 체노보스키온의 사람이다. 내가 직접 걸어가보니 엘카스르에서 함라돔은 한 10리 정도의 길이었다. 그런데 이 두 마을 사이에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카퓨렛 집안과 몽테그 집안의 패밀리 퓨드(family feud)와도 같은 피맺힌 누대의 반목과 원한이 쌓여 있었다.

풍요로운 이집트 농촌 엘카스르에서(위). 동네마다 이렇게 무장한 민병들이 지키고 있다(아래).
알리는 낙타 등 위에서 지난 5월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하신 아버지에 대한 사모의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경찰기록에 의하면 1945년 5월 7일 사망). 그 대강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그 의 아버지는 엘카스르의 수리조합에서 경비원을 하고 있었다. 범람시기에 넘친 물을 저장하거나, 또 부족하면 나일강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수로는 이집트 농촌의 생명줄이다. 그는 독일에서 수입해온 비싼 관개시설의 밤경비를 하고 있었는데, 관개시설이라고 해봐야 뭐 대단한 것이 아니고 좋은 물펌프 모터 정도의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함라돔 마을에서 그 관개시설을 훔치려는 침입자가 발생했다. 알리의 아버지는 그 침입자를 죽여버렸다. 그런데 다음 날 함라돔 사람들이 몰려와서 알리 아버지의 머리에 총을 디밀었다. 24시간 후에 알리 아버지는 자기가 쏘아 죽인 침입자의 시체가 놓였던 바로 그곳에 시체로 누워 있어야 했다. 함라돔의 하우와리스(Hawwaris) 집안 사람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선지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선민의식과 프라이드가 강했다.

무함마드 알리의 엄마는 남편의 시체 앞에서 일곱 아들(아들만 7명 낳았다)을 모아놓고 대성통곡을 하며 긴 낫의 칼날을 세워놓으라고 훈계를 했다. 그들은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뒤로 매일 알리는 숫돌에 낫을 갈면서 맹세를 다짐해왔던 것이다.

자기 등에 둘러멘 코우덱스 문서가 얼마나 고귀한 인류문명의 유산인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열일곱 세기에 걸친 가톨릭교회 도그마 중심의 인류사가 다시 쓰이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신화적 세계를 탈피하여 동서문화의 진면목이 새롭게 소통되는 개벽의 역사가 도래할 수 있다는 일말의 하중도 느끼지 못하는 알리는 낙타 등 위에서 오로지 아버지 복수할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등에 메고 있었던 파피루스 코우덱스를 쇠죽 쑤는 곳간 방 지푸라기 더미 위에 내던져버렸다. 너무도 끔찍한 참변이었다. 사실 1578년간 밀폐된 옹기의 고요한 암흑 속에서 일체의 빛이나 신선한 공기의 흐름에 노출된 적이 없는 유물은, 갑자기 환경변화에 노출되면 변색ㆍ퇴색하거나 바스러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파피루스 위에 쓰여진 물감은 용케 새 환경을 견디었던 모양이다. 진시황릉의 토용들이 뚜껑을 열자마자 그 찬란한 색깔이 곧 신기루처럼 휘발해버린 것에 비하면 파피루스 위에 쓰여진 광석 혹은 카본 계열의 물감이나 그 접착제의 강력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천 년이 넘는 지하분묘나 유적에서 종이유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상상키 어렵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수천 년을 견딘다. 파피루스가 더 우수해서일까? 천만에! 사막이라는 건조한 풍토의 덕분인 것이다. 삼천리금수강산과도 같은 옥토에서는 모든 공기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습기 때문에 박테리아의 서식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러나 비극은 결코 이런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그날 밤 알리의 엄마가 화덕 오븐에 불을 지피러 나갔다가 헛간에 파피루스가 보이니까 죽죽 찢어서 지푸라기와 함께 불쏘시개로 썼다는 사실에 있다. 열여섯 세기의 이단 박해를 견디어낸 사막의 코우덱스가 일순간에 엘카스르 농갓집 아궁이로 들어가다니! 하긴 겸재 정선의 화첩 등 소중한 우리 문화재도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어찌 알리 어미만을 탓하리오마는, 다행스럽게 불 지피는 쏘시개로만 썼기 때문에 많은 파피루스가 타지는 않았다. 하여튼 우리의 도마복음서는 불쏘시개 리스트 속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드디어 복수의 날이 왔다.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고 꼭 한 달! 동네친구 한 사람이 알리의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알리 아버지를 죽인 함라돔 마을의 한 사람이 먼지 나는 신작로에서 내리쬐는 태양에 지쳐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다. 사탕수수를 고아 만든 조청단지를 끼고 누워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알리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고 일러주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의 이름은 아흐마드 이스마일(Ahmad Ismail), 그가 정확한 범인이었는지 어쩐지 누가 알리오마는, 하여튼 일곱 형제들은 엄마의 말대로 서슬 퍼렇게 날을 세워둔 낫과 곡괭이를 하나씩 차고 용전(勇戰)의 길을 떠났다. 피의 복수! 그들에게는 지하드였다.

함라돔 의 재수없는 이 양반의 가슴엔 도망칠 새도 없이 잠결에 7형제들의 칼날이 들이닥쳤다. 가슴을 헤치고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일곱 등분하여 일곱 형제들은 당장에서 질겅질겅 씹어 먹었던 것이다. 그들의 얼굴엔 희색이 만면했다. 이들의 관습으로는 마땅한 복수의 충직한 상징적 행동이었다. 하긴 위대한 선지 엘리야도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갈멜산 기손개울에서 한 명도 남김없이 도륙했으니…(왕상 18:40).

나는 엘카스르에서 알리의 족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지금 살아있다면 그는 88세일 것이다. 그의 친척이라도 찾으려 했으나 나의 빈약한 정보로는 실마리가 잡히질 않았다. 나는 엘카스르에서 함라돔으로 가는 도중 에즈발 부우사라는 동네에서 문서발견지를 안다고 하는 사람 두 사람을 만났다.

“함라돔이란 그 동네에서 나는 과일 이름 땜에 붙여진 이름이라오. 그 과일이 껍질이 붉은데 그게 바로 피멍 들어 그렇다고들 하죠. 그렇게 지랄스럽게 싸워요.”

“아직도 함라돔 사람하고 엘카스르 사람이 싸웁니까?”

“요즘은 함라돔 마을 사람들 지들끼리 싸운다우. 함라돔 근처에는 아무도 안 가요.”

그 들은 문서발견지는 알고 있지만 내가 같이 가자고 하니까 한사코 같이 가기를 꺼려했다. 엊그저께도 총기사건이 나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또다시 ‘사례금’을 두둑하게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나와 동행한 사복 경찰은 허리에 찬 권총의 안전핀을 풀었던 것이다.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①

중앙 SUNDAY

600년 암흑을 뚫고 나온 도마복음의 첫 운명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GOSPEL OF THOMAS

김용옥 | 제8호 | 20070506 입력


①‘나그함마디’로 가는 길 기독교는 2000여 성상을 거쳐 형성되어 온 것이다. 이 말은 곧, 모든 종교가 한 시점에서의 완성된 고정적 모습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세기의 기독교나 4세기의 기독교나 16세기의 기독교나 21세기의 기독교가 다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기독교의 모습이다. 기독교는 물론 예수교(예수의 가르침)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가 과연 누구인지 모든 신학자의 견해가 분분하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The New Testament)도 똑같이 2000여 성상을 거쳐 같이 형성되어 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의 정본은 어느 곳에도 없다. 오늘의 27서 체제 신약성경은 4세기 후반에나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지만 4세기의 성경이나, 오늘날 한국인이 읽고 있는 한글 개역판 성경은 똑같은 자격을 지니는 성서의 다른 판본일 뿐이다. 신학도들이 정본의 기준으로 삼는 희랍어 성경도 그 자체가 19세기 말에나 겨우 구비된 모습을 갖춘 것이다. 예수는 희랍어가 아닌 아람어(Aramaic)라는 갈릴리 토속 말을 한 사람이었다. 20세기는 인류 사상 가장 위대한 고고학 발굴 성과의 시기였다. 그중 성서와 관련된 두 개의 발굴이 있다. 하나는 구약과 관련된 사해 부근의 쿰란 공동체 동굴 라이브러리 문서의 발견이고, 하나는 신약과 관련된 나일강 중류 나그함마디 체노보스키온 문서의 발견이다. 후자의 문서는 외경으로 가볍게 처리될 그런 문서가 아니라 성경 자체의 이해를 풍요롭게 만드는 진본일 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위대한, 아니 가히 혁명적이라 말할 수 있는 문헌임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따른 신학 논쟁도 날로 깊어지고 있다. 성서를 성령의 강림이라고만 믿고 있는 많은 사람도 이 한 가지 사실만은 알아야 한다. 성령도 반드시 시간 속에, 우리의 삶의 역사 속에 강림하는 것이다. 이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나와 함께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이 어떠할는지! 모든 종교나 진리는 형성 중에 있다 (All religion is in the making). 완결은 죽음이다. 새로운 형성을 향한 나의 발돋움이 한국의 기독교와 우리 사회를 보다 생명력 있고, 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게 되기만을 간절히 기도한다.
도마복음서를 게벨 알 타리프 절벽에 숨긴 것은 인류사상 최초의 조직적 공동체 수도원을 만든 파코미우스의 제자들이었다. 이 성화는 파코미우스(오른쪽)와 그의 스승 팔라몬을 그린 것이다. 엘카스르의 팔라몬기념수도원에서 찍었다. 사진=임진권 기자
사 바크(sabakh)! 백문불여일견이라. 나는 실제로 나일강 언저리의 척박한 사막고원 일대를 밟아 보고야 알았다. 그것은 바위산 절벽 밑에서 캘 수 있는 층층비늘처럼 쌓인 암석층인데 쉽게 부스러진다. 겉은 누르스름하지만 쇠 절구로 빻으면 하얀 석회처럼 고운 가루가 된다. 질소를 풍부히 함유한 천연비료가 되는 것이다. 과거 이집트 농부들은 그것을 땅에 뿌리곤 했다. 요즈음은 화학비료를 선호한다고 했다. 아스완 댐으로 범람이 사라지고 땅은 점점 산성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파 코미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와도 교분이 있었다. 나는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이로 근교의 쿠푸왕 대피라미드는 146m에 달하는 거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세시대보다도 13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사 바크를 캐 오는 것은 통상 동네 아이들의 몫이다. 이집트 사막을 통과하는 나일강은 아스완을 지나 룩소르(Luxor)에 이르러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을 끼고 크게 휘돈다. 그 굽이가 끝나는 지역에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나일강 서안의 도시가 있다. 나그함마디에서 강 건너편 마주 보는 곳에 엘카스르(El Qasr)라는 작은 농촌이 있다. 그 농촌을 체노보스키온(Chenoboskion)이라고도 부른다. 내가 찾아간 엘카스르에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초기 기독교 수도승 세인트 파코미우스(St. PachomiusㆍAD 292~346)의 스승이었던 세인트 팔라몬(St. Palamon, Anba Balamun)을 기념하는 수도원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수도원을 지키는 매우 노쇠하게 보이는 파파 노인이 한 명 있었는데 통성명을 해 보니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어렸다.

1945년 12월의 사건이었다. 이 엘카스르 동네의 어린아이들이 일곱 명 떼지어 낙타를 타고 사바크를 캐러 원정을 떠났다. 12월은 날씨도 선선하고 땅이 물러 사바크를 캐기도 좋고 그때가 마침 나일강 유역이 경작기라서 비료를 줄 시기인 것이다. 엘카스르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에 게벨 알 타리프(Gebel al-Tarif)라는 기암절벽 산이 있다. 그 기슭에 사바크는 무진장 있다. 한 아이가 곡괭이질을 해대는데 파각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심상치 않은 공명 소리에 곡괭이를 멈추었다.

도마복음서가 발견된 타리프 절벽(위), 이 동네사람들이 비료로 쓰는 사바크(가운데), 이집트 콥틱크리스찬의 순례지 아부메나 수도원(아래)
큰 바위 밑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니 거대한 붉은색 토기 항아리가 자태를 드러냈다. 아가리와 밑동은 좁고 중간은 불룩하다. 목 네 귀퉁이로 손잡이 고리가 달려 있고, 아가리는 사발로 덮여 있었는데, 가장자리는 천연 아스팔트 역청으로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한 아이는 15세의 아부 알 마지드(Abu al-Majd)였다. 이 아이는 겁이 덜컥 나 그 사실을 같이 간 큰형에게 알렸다. 형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al-Samman)는 26세로 사바크 원정대의 팀장 격이었다. 알리는 높이 70㎝가량의 이 신비로운 항아리를 개봉하기를 매우 두려워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스토리에도 나오듯이 이집트인의 관념에는 대개 이런 항아리 속에는 진(jinn)이라는 사기(邪氣)가 들어 있다고 믿었다. 잘못 뜯었다간 그 사기가 빠져나와 거대한 사람이나 동물 형상의 귀신이 되어 사람을 해한다는 액운의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삼만 족속의 이 무하마드 알리는 흑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와 이름은 같지만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지렁이 촌놈이었다. 불행하게도 찬란한 이집트 고대문명의 성과가 이들 후예에게는 전혀 전달되어 있질 않았다.

알리는 진에 대한 공포도 있었지만 퍼뜩 불순한 탐욕에 사로잡힌다. 그래! 이런 마법의 항아리 속에 찬란한 파라오의 금은보화가 가득 차 있을 수도 있다. 용기가 솟았다. 순간 알리는 곡괭이를 들어 힘차게 내리쳤다. 학계의 추산으로 따지면 정확하게 1578년 동안 이 항아리의 흑암 속에 갇혀 있었던 인류문명의 한 거대한 보고가 인간세의 광명으로 드러나는 그런 위대한 순간이었다.

항아리는 산산조각 났다. 어찌 되었을까? 그 순간 알리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정말 번쩍이는 금은보화가 가득 차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금가루의 진이 하늘을 수놓는 듯 허공이 빛났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그의 발 아래 드러난 것은 파피루스(papyrus) 다발을 가죽으로 정중하게 포장하고 묶은 13개의 코우덱스(codex)였다. 아마도 이 코우덱스 겉가죽이 금박으로 장식되었을 수도 있다. 순간 그 금가루들이 증발했을 것이다.

김 이 팍 샜다. 우선 돈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파피루스 파편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고문명의 후예들이 아닌 것이다. 기원 전후 시기에 책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양피지(parchment)라는 것인데, 양이나 염소ㆍ소가죽을 재료로 쓴 것이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가 보는 족자 형태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볼룸(volume)으로 센다. 또 하나는 파피루스인데 이것은 나일강 하류 델타 지역에서 페니키아 일대에 자생하는 4~5m가량의 갈대풀인데 이것을 잘라 엮어 편편한 바위로 눌러 놓으면 저절로 풀 성분이 나와 접착되어 종이처럼 된다. 파피루스는 1~2세기 께는 꼭 요즈음 책(冊)처럼 한쪽으로 묶어 제본을 했다. 그 제본된 책을 가죽 보자기로 싸고 네 귀퉁이에 묶인 끈으로 둘러 묶는다. 이것을 우리는 코우덱스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하나의 코우덱스 속에는 대여섯 개의 책이 같이 제본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알리가 깬 항아리에서 나온 13개의 코우덱스 속에는 필경 60여 개의 책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신약성경보다 많은 분량이다.

사바크 절벽 비탈에 나둥그러진 이 지저분한 가죽 코우덱스를 바라보던 아이들은 모두 재수없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렇다고 항아리를 깨고 얻은 전리품을 혼자 독식하는 것도 별로 체면이 서지 않았다. 알리는 그 코우덱스를 북북 찢어 일곱 명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코우덱스를 북북 찢는 그 장면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파피루스를 손에 든 아이들은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우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알리가 나누어 주는 품새가 뭔가 내키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아이들은 곧 파피루스를 모두 알리에게 되돌려주었다. 우린 담배도 안 피운다. 너나 팔아 담배 몇 개비라도 얻어 먹어라! 썅. 그나마 그것을 알리에게 돌려준 아이들의 푸념의 심정이라도 하나님께서 내려주시지 않았더라면 21세기 정신혁명의 한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이 위대한 발견이 흔적 없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알리는 아이들이 돌려준 코우덱스를 터번을 풀어 두루루 말아 등에 메고 어깨를 둘러 가슴에 잡아맸다. 그리고 낙타에 올라타 터덜터덜 다시 알카스르로 향했다. 그 순간 알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는 인류사의 한 희ㆍ비극이 교차되는 그 운명의 장소를 꼭 찾아가서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는 관광 코스로 지정되어 있는 국립공원을 벗어날 경우 반드시 경찰에 신고를 해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나는 룩소르 경찰청에 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이틀이나 기다렸다. 겨우 허가가 떨어졌다. 무장한 경찰차가 우리를 앞뒤로 호송했다. 우리 일행 6명이 나타나니깐 나머지 54명은 어디 있느냐고 했다. 경찰청은 한국인 관광객 60명이 게벨 알 타리프를 방문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60명이라는 숫자 때문에 허가가 떨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60명의 호송 비용을 나 혼자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는 함라돔(Hamra Dom)은 특별 분쟁지역이며 엊그제도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했다. 대통령 무바라크도 안 가는 곳이라 했다. 룩소르를 출발해서 검문소마다 그 지역 경찰들이 차를 갈아탔다. 내 차에는 사복경찰이 한 명 올라탔다. 그 지역 지리에 밝은 그 지방 사람이었다. 우리 차가 알카스르에서 에즈발 부우사라는 작은 동네를 거쳐 드디어 함라돔에 도착했을 때 사복 경찰은 허리에 찬 권총을 꺼내더니 안전핀을 풀었다.

“왜 그러슈?”

“가까이 오면 가차없이 쏴 버릴 겁니다.”

신뢰 信賴

작가소개 - 르네 마그리트 勒妮

1898 년 벨기에에서 출생한 마그리트는 1916년부터 브뤼셀의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emie des Beaux-Arts)에서 수학하면서 미술공부를 시작하였고, 이후 10여 년간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제작한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경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해 나가기 시작했고, 1927년부터 3년 간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교류를 위해 파리에 머물기도 했다.

1925 년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인 앙드레 브르통의「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기점으로 결성된 초현실주의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촉발된 다다이즘(Dadaism)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성과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서구문명 전반에 대한 반역을 꿈꾸었던 예술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이성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 상상력의 세계를 회복시키고 인간정신을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사용해 거의 추상에 가까운 작품을 제작했던 것과 달리 마그리트는 사과, 돌, 새, 벨, 담배 파이프 등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요소들을 동일한 화폭에 결합시키거나, 어떤 오브제를 전혀 엉뚱한 환경에 위치시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을 이용한 작품들을 주로 선보였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 기법은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놓는 '고립', 독수리를 돌의 재질과 같이 변형시키는 식으로 사물이 가진 성질 가운데 하나를 바꾸는 '변경', 성채와 나무 밑 둥을 결합하는 식의 '사물의 잡종화', 작은 사물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하는 식의 '크기의 변화',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두 사물을 나란히 붙여놓는 '이상한 만남',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이미지의 중첩',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그림 안에 존재하는 '패러독스' 등의 방법으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1950 년대에 들어서 마그리트는 기존의 작업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양식의 작업을 선보이기도 하는데, 인상주의 시기와 바슈(vache) 시기의 작업이 그것이다. 인상주의 작가, 특히 르누아르의 영향을 반영하는 주제와 화려한 색채, 표현적인 붓 터치로 특징지어 지는 마그리트의 인상주의 시기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했던 시기의 불안감과 억압적 상황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된다. 바슈 시기는 1957년 단 2주에 걸친 예외적인 실험으로 프랑스의 야수주의에 대한 영향과 동시에 풍자를 반영하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인상주의 시기와 바슈 시기를 제외하면 마그리트의 작업은 1930년대 초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주제와 이미지(오브제의 데페이즈망, 단어의 사용, 인간의 조건, 중절모를 쓴 남자)가 평생의 작업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되어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오브제의 데페이즈망 뿐 아니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로 대표되는 말과 사물의 관계를 다룬 작품들, 현실의 3차원 공간과 캔버스 위의 2차원 공간 간의 모순을 다룬 인간의 조건 등 마그리트의 예술은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우리가 속해있는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요구한다. 기발한 발상, 관습적 사고의 거부,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시적인 조형성 등은 초현실주의자로서의 마그리트의 면모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보다 경도되었던 것에 비해 마그리트의 작품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근거를 가진다. 실제로 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화가라는 이름 대신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던 마그리트는 철학자처럼 끊임없이 존재와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작가였다. 그래서 마그리트의 작품은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림, 상식을 뒤엎는 창의적인 사고를 자극하며 우리가 속해있는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철학적인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고 동·서양의 구분을 넘어 음악(비틀즈의 음악과 애플 레코드사의 사과모양 로고), 영화(매트릭스 시리즈), 문학(김영하의 <빛의 제국>), 교육(대학 입시 논술 고사 문제로 출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도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으며,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의 거장에서 더 나아가 20세기 미술의 거장으로 칭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이 번 전시에는 마그리트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 뿐 아니라 2006년 여름 프랑스 파리의 마이욜 미술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던 마그리트의 드로잉전과 역시 비슷한 시기에 파리의 유럽 사진 미술관에서 열렸던 마그리트의 사진전에 소개되었던 사진 및 영상작업 (마그리트가 직접 찍은 사진과 단편 영화) 등이 대부분 소개되어, 마그리트의 삶과 예술을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인간의 조건 人间的条件